1990년 단국대학교에서는 아랍어과를 신설할 예정으로 현지인 교수를 초빙했어
그는 1984년에 한국에 들어와 연대 한국어 학당을 수료하고
단대에서 박사과정을 딴 후 단국대 사학과에 교수 임용이 되었어.
아랍어, 필리핀어, 한국어, 영어 등 7개국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로 매주 금요일마다 기도를 드렸고
성품도 선량하여 학생들에 인기도 많았으며
a+폭격기, 간디 교수라는 평을 받았어.
그러던 중 1996년,
안기부에서 무하마드 깐수 교수를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해
알고보니 깐수의 정체는 조선족 출신의 북한 간첩 정수일이었고
나이, 이름, 국적, 종교, 경력, 기혼 여부 및 자녀 유무까지 모두 거짓이었어
1934년 11월 12일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조선족이었던 정수일은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어.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하고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주 모로코 중공 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으로 활동한 엘리트였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엘리트의 길을 걸었던 정수일은 1963년 6월에 민족주의 정서에 젖어 북한으로 이주하기로 했어.
북한에 망명한 후에는 1974년까지 평양국제대학과 평양외국어대학 동아시아학부 아랍어과 교수로 재직했지.
결국 아랍어과 학과장까지 지냈어. 평양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언어 능력과 외모로 조선노동당의 관심을 끌게 되었어.
그래서 1974년 9월부터 1979년 1월까지 간첩 교육을 받고 남파 공작원으로 변신했어.
1979년 1월, 레바논 국가를 접수하고 남한을 암시하며 중요한 정치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레바논이 전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베이루트로 향했지.
1979년 11월 ‘무하마드 깐수’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어.
말레이시아 이슬람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경력을 쌓은 뒤 19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했어.
1984년 2월, 필리핀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의 아들 깐수로 국적 검열을 통과해 한국 입국에 성공했어.
한국에서는 1984년 6월부터 1996년 7월까지
단파 라디오를 통해 161번에 걸쳐 북한 지령을 받아들였어.
남한에 있을 때 상급에서는 구체적인 첩보활동을 요구했고,
1996년 2월까지 암호화된 편지를 통해 75건의 정보를 전달했지만
통일부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어.
편지는 영어로 작성된 것처럼 보였지만,
뒷면에는 특수문자로 작성된 비밀 보고서가 들어 있었어.
이 특수문자는 20번 정도 반짝반짝 빛이 난 후에야 눈에 들어왔고
특수 화학처리가 필요했어.
그런데 1996년 3월에 팩스로 전송 수단을 바꾸면서 들키게 됐어.
후에 폭로된 바에 따르면 정보 내용은 북한에 대한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해.
이는 재판에서도 반영돼 초기 사형 판결에서 벌금형으로 감형됐어.
변장이 너무나 철저해서 그의 아내조차 그가 간첩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고 해.
그는 실제로 잠을 자면서 아랍어로 중얼거리고,
무슬림의 생활을 코스프레하는 정도였어.
한국에서 한 결혼도 첫번째가 아니었고,
그의 부인과 성인이 된 딸들은 모두 북한에 살고 있었대.
판결은 정수일이 필리핀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법상 국외추방을 요청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는 출입국 관리법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있는 곳에 있었는데도
출국을 포기하고 자신의 국적을 ‘북한’으로 밝혔어.
처음에는 약간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외국인 행세를 했지만,
체포된 이후에는 완벽한 한국어를 써가며 수사관들을 놀라게 했어.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정수일의 사연과 탐사 결과, 참회의 의사 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형으로 선고받았어.
그 후 2000년 광복절에 석방돼서
2003년에는 특별사면과 복권을 받고 학계로 돌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