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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면 어이가 없어지는 살인사건 – 부천비디오가게쉐도우살인사건

1998년 3월 2일 새벽 1시.
부천의 한 비디오 가게에서 불이 났어.
비디오가게의 출입문은 굳게 잠겨있었는데,
문을 부시고 안에 들어가보니 다행히 큰 화재는 아니었어.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은 손전등을 비춰 인명 수색을 하던 중
수상한 더미를 발견하게 됐어.
앞으로 다가가 불빛을 비춰보니 그 수상한 더미는 바로 시신이었어.

피해자 신원 김씨(39세) 비디오 가게 주인 시신의 모습은
굉장히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어.
반듯하게 누워있는 모습이었는데,
마치 미라처럼 발목부터 시작해 가슴까지
박스테이프로 전부 결박되어 있는 모습이었어.
특히 머리쪽에 담요같은 것이 씌워져 있어
이 담요를 치워보니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고,
비닐봉지 또한 빼내니 눈만 드러나 있는 두건이 씌여져 있었어.
(두건→비닐봉지→담요 순)
그리고 그 두건까지 완전히 벗겨내니,
얼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되어 있었어.
폭행으로 인해 두개골도 함몰이 되어있었는데
누군가 둔기로 무지막지하게 구타를 해서 살인 후
불을 지른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었어.

도대체 누가 이런짓을 벌인 까?

현장에는 지문이나 족적등 증거가 남아있지 않았는데
이는 화재진압으로 인해 현장이 훼손되어
증거가 사라져 버린 상황이었어.
또한 외부의 칩입 흔적도 전혀 없었고,
저항의 흔적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어.
저항한 흔적이 없었다는 것은 의식을 잃은 후에
테이프로 결박했던 것이었을까?
부검결과, 알콜성분이나 약물성분은 전혀 검출이 되지 않았어.
이 말은 즉, 약이나 술을 마신 상태가 아닌
맨정신의 상태에서 결박을 당하고 공격을 받았지만
저항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됐어.
여기서 경찰들은 폭행 방식에 주목을 하게 됐어.
단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하기엔
너무 복잡한 살해 방식이었다고 생각한 경찰들은
피해자에게 엄청난 분노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어.

맨 처음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아내였어.
조사를 해보니 김씨 앞으로 가입되어있던 보험이 있었어.
머리에 큰 상해를 입으면 8천만원,
사망을 하게 되면 총 4억원의 보험금을 탈 수가 있었던 상황이었어.
하지만 범행 당시 아내는 알리바이가 확실했으며,
결정적으로 아내는 남편이 생명 보험에 가입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어.

경찰은 용의자의 범위를 더 넓혀 수사하던 중
사건현장을 배회하던 26살 남성 임성필을 발견하게 됐어.
경찰들이 임성필을 조사해 보니 피해자 김씨의 집 옥탑방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비디오 가게 일도 도와줄 정도로 친한 사이었어.
그렇게 친한 형님의 죽음에도 방관하듯
아무렇지 않게 구경만 하고 있는 모습에
경찰들은 의심을 품고 용의자로 잡아 수사를 진행했어.

임씨는 사건 발생 당시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불이난 것도 몰랐다며 범행사실을 극구 부인하게 되는데
그 당시엔 cctv나 블랙박스 등
증거로 삼을 만한 것들이 없어 이 알리바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어.

형사는 임씨에게 김씨의 아내와 불륜 사이이며,
보험금을 노리고 같이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냐고 추궁을 하기 시작했어.
그렇게 계속 질문하던 형사는
“왜그랬냐?” 라며 한마디를 던졌는데,
거기서 임씨는 뜻밖의 대답을 하게 됐어.
“형수님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저 혼자 했어요. 형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
그렇게 뜻밖의 자백을 받아내게 됐어.

임성필씨의 대답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형사들은 그 날 임씨의 집을 압수수색하기 시작했어.
임씨의 옥탑방 문을 열어보니,
방 한쪽엔 모니터 여러 대가 놓여져 있었어.
그 화면 속에는 피해자 부부의 거실, 안방, 부엌 등 집안 곳곳이
실시간으로 중계가 되고 있었어.
임씨가 몰래 피해자 부부의 집 안에 cctv를 설치해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었어.

임성필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임씨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어.
부모의 이름,얼굴도 모른채 친척집에 맡겨져 살았다고 해.
그러다 19살때 무작정 집을 나와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어
그때 당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임씨는
앵벌이나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가 피해자 김씨부부를 만나게 됐어.

피해자 김씨의 아내는 임씨가 안쓰러운 마음에 이것저것 챙겨주게 되는데,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부모에 대한 사랑? 애정을 처음으로 받아본 임씨는
김씨의 아내에게 빠져들게 되었어.
급기야 그 부부의 옥탑방으로 이사를 하게되고,
형수를 사랑하는(?) 마음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부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게 된 것이었어.
그렇게 지켜본 결과 이 김씨 부부는 보이는 것과 다르게
사이가 좋지 못했어.
부부싸움도 잦고, 아내에게 돈도 잘 안가져다 주며
구박만 하는 모습을 본 임씨는 이때부터 남편 김씨에 대한 분노가 생기게 되었어.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준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 해코지하는 사람은 다 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야.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 되는 줄 알았는데,
사건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어.
형사는 임씨에게 왜 살해했는지 물어보게 되었어.
임씨는
“형님(피해자)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살해한 적 없고,
형님이 시키는 대로 한 대만 때렸을 뿐이다.”
라고 말했어.

가해자 임성필의 주장에 따르면,
범행 3일 전, 피해자 김연택이 자신을 먼저 불렀다고 해.
김씨는 보험사기를 임씨에게 제안하며,
자신의 머리를 가격해 주면 그 대가로
보험금의 3분의 1을 주기로 약속하게 됐어.
그렇게 머리에 상해를 입힌 후 강도로 위장하기로
계획을 세우게 되었어.

보험사기를 실행하기로 한 날,
머리만 정확하게 맞기 위해서 테이프로 몸을 결박하게 됐어.
(혹시나 때릴려고 하다가 순간 겁을 먹고 막을 수도 있기 때문)
그래서 김씨의 몸이 테이프로 결박이 되어 있었지만,
저항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었던 것이었어.
그리고 피가 튀어 가게에 흔적이 남을까봐 두건을 쓰고
비닐봉지를 쓰고, 혹시 때리는 걸 보게 되면 머리를 움직일까 싶어
그 위에 담요를 덮게 되었어.
그리고 당구 큐대로 머리를 가격했는데,
머리를 치고 당구 큐대가 부러진 다음부터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어.
자신은 왜 시신의 얼굴이 그렇게 훼손이 되어있고,
가게에 불이 난 것도 전혀 모른다고 주장했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진술에 형사는 임씨를 계속 추궁하다가
당시 사건 현장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본 형사들은 임씨의 말대로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진 보험 사기극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어.
그 비디오 속에는 어떤 장면이 녹화되어 있었을까?

김연택과 임성필은 비디오 카메라와 붕대, 테이프 등을 챙긴 후
서로의 계약 내용을 확인한 후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를 시작한 뒤 범행을 진행했어.
임성필이 김연택을 결박하는 장면도 나왔고, 임성필은
“조금만 참아요, 아프지 않게 빨리 끝낼 테니 걱정 마세요.”
라며 김연택을 진정시켰어, 김연택은
“숨 막혀 죽겠어!” 라며 투덜대는 장면까지 녹화되어 있었어.
이후 “형님, 시작하겠습니다.”라며 임성필이 정중히 말한 후
당구 큐대로 김연택의 머리를 내리치게 되었어.

여기까지 보면,
임씨의 말대로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진 보험 사기극이 사실이었던 것이었어.

그렇다면 피해자는 왜 이렇게 처참하게 죽은 것이었을까?
그 해답은 영상의 뒷장면에 있었어.

그렇게 머리를 친 임성필은 화면 밖으로 잠시 사라진 후 재등장하게 되었어.
이때부터 갑자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어.
15초 후에 재등장한 임씨는 손에 벽돌을 들고 있었어.
임씨는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난 ‘섀도우’다.
너 같이 마누라 고생시키는 놈들 죽이러 온 사람이다.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난 3,000살 먹은 악마다!
수천 년전부터 널 응징하기 위해 기다렸다!
비밀을 지키라니깐 비밀을 누설해?
우리 ‘섀도우 클럽’은 비밀을 누설하면 가만 두지 않아!”
라고 소리치며,
묶여있던 김씨를 마구 공격하기 시작하게 되었어.

(형사는 임씨의 집에서 자신을 섀도우 클럽 소속이라고 밝힌 명함과
섀도우 클럽에서 준 명패를 보고 정말 있는 단체인가 싶어 조사했지만 .
유령 단체로 밝혀졌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피해자에게 반말로 욕을 퍼부우며
무지막지한 공격은 계속 되었어.
더 끔찍했던 장면은 피해자가 죽은 후에도 계속 내려쳤던 장면이었어.
다시 등장하기 전, 깍듯하게 대했던 임씨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경찰은 녹화된 비디오를 임씨에게 보여주게 되었어.
임성필은 큐대로 머리를 한 대 치는 장면까지는
자신이 한 행동이 맞다며 잘 보는 듯 했어,
그러나 욕설을 하며 벽돌로 김연택을 내리치는 장면 이후
비정상적으로 돌변한 임씨는 자기 행동을 이해 못하겠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그 행동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

정신과 전문가들은 이 행동이 연기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의사들은 해리성 정체성 장애, 다중인격을 주장하기도 했어.
게다가 악령에 빙의되었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법원은 임씨에게 정신적 질환은 없다고 판단했어.
법정에서는 김씨와의 보험 사기 계획으로부터 범죄가 계획된 것이라고 인정했고,
임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현재까지 복역 중이야.

밀실 살인사건 -> 보험사기 자작극 -> 나의 이름은 쉐도우 

분노의 나라망신 – 17사단 김태희 하사 성추행 사건

17사단에 미모의 여군 하사가 있었는데,

외모가 워낙 출중해서 별명이 ‘김태희 하사’였어.

본래는 외모 덕분에 국방부 의장대로 발령이 났는데,

본인이 전 방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어필해서 모 부대에 배치됐어.

워낙 예뻐서 병장들까지 이 여군 하사에게 잘 보이려고 향수 뿌리고 외모 단장할 정도였어.

한술 더 떠 나이차가 30살이 넘었던 주임원사는

아예 몇 차례에 걸쳐 성추행을 해버렸어.

참다 못한 김태희 하사는 이를 상부에 신고했고,

주임원사는 타 부대로 전출가고 하사는 17사단에 배치됐어.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전입 신고를 중대장에게 하지 않고

사단장(송유진 소장)에게 직접 하게 됐어.

당시 17사단장 송유진 소장

김태희 하사를 본 사단장은 첫눈에 반해버렸어.

이미 알고 있던 사단장은 하사에게

여기서는 불미스런 일이 없도록 최대한 막아주겠다고 위로했어.

하사는 이 말을 듣고 감정에 복받쳐 울기 시작했어.

사단장은 울고 있는 하사를 위로해준다고 어깨를 두드리다가 입맞춤까지 해버렸는데…

기가 막혔던 하사는 헌병대에 신고했고,

헌병대는 사건의 심각성을 감안하여 국방조사본부에 보고했어.

국방조사본부에서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며

사단장과의 대화를 녹음하라고 했어.

하사는 바로 사단장과의 면담 신청했어.

사단장은 김태희 하사에게 자신과 정식으로 사귀자면서,

본인과 같이 전역 후 교제하면 법적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했어.

군인공제회 과장 자리를 알아봐줄 테니

생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어.

하사는 이 같은 대화를 그대로 녹음해서 조사본부에 제출했고,

빼도박도 못한 증거를 잡은 국방부는 송 사단장을 성추행 혐의로 긴급 체포했어.

송 사단장은 이후 대법원에서 징역 6개월의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어.

군납비리와 뇌물수수나 보안사건으로 현역 장성이 구속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성추행으로 현역 국군 장성이 처음으로 구속된 건 창군 이래 최초였어.

이게 얼마나 막장스러운 사건이냐면 피해를 당한 부사관은 이 사건 이전에도

다른 가해자에 의한 성추행을 당했던 피해자였고,

가해자는 징역을 살고 있던 상태라는 게 경악스러웠어.

그것도 2014년 당시 윤 일병 사건, 임 병장 사건이 잇달아 터져서

군 내부에서 각종 대책을 내놓았음에도 국군 장병 인권문제가 국민들의 지탄을 받은 시기였는데,

그런 때에 행동에 좀 더 조심해야 된다는 걸

정상적인 사고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때에 이런 일을 벌였어.

더 한심한 건 육군이 위의 두 사건 이후 전 부대에 인권과 관련한 정밀 조사를 실시했는데도,

이런 짓을 하고 있던 걸 전혀 파악하지도 못하고

이 인간을 구속되기 단 사흘 전에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으로 영전시킬 예정이었다는 거야.

실제로 구속 직후 해당 요직은 어부지리로 동기인 당시 3사단장 김운용이 영전했어.

항소심에서도 그는 징역 6개월의 실형 선고를 받았고 국군교도소에 수감되었어.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즉 성범죄자 알림e 등재)도 명령받았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법원도 인정한 진정한 똥별이자

성범죄자 알림e 등재 1호 장성으로 영원히 기록에 남게 되었다는 거야.

분노주의) 채선당 임산부 폭행 사건의 진실

천안에 위치한 채선당을 찾은 임산부가

종업원과 시비 끝에 다툼이 있었고

해당 임산부가 이러한 내용을 인터넷에 올림

내용은

음식 주문 문제로 채선당 종업원과 트러블이 있었고
자신의 임신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배를 걷어차이는 등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

글이 올라온 후 이슈가 되자

종업원의 동생이 네이트판에 글을 올림

사건 당일의 CCTV와 대질 심문 등을 통해

채선당 임산부 폭행 사건의 진실을 경찰이 수사한 결과..

“종업원과 임산부의 상호간 다툼은 인정됐지만 임산부는 발로 배를 맞지 않았다”

즉 채선당 임산부 폭행 사건의 가장 핵심이었던

‘임산부의 복부 폭행’은

결국 임산부 측의 허위 주장이였음.

거짓 주장이 들통나자 임산부는

“넘어져서 태아에게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충격으로 정확한 기억을 하지 못했다” 며

“임산부들이 내 의견에 모두 공감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는 말로 해명함

그런데 더 심각한 건

얼마 후 해당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점주분의 근황이 나옴

수소문 끝에 가게를 접고 농사를 짓고 있다는 채선당 점주님를 만남.

점주님은 작은 팥 밭을 일구며 지내고 있었고

“금전상으로도 손해를 많이 봤고 정서적으로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며

당시 일을 떠올리기도 싫다고 함.

처음에 가게를 열 때 2억8000만원이 들어갔는데

주방기구 같은 걸 다 내주고 나왔고

그거 1000만원 받아서 총 1억1000만원 받았으니까

나머지는 다 손해 본 것

그러면서 점주님은 세상을 떠난 아들이 남긴 가게를

지켜주지 못해 괴로웠다며 눈시울을 붉힘.

당시 식당은 암 투병 중이던 큰아들이

남겨질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가게였음….

경주 여고생 실종 사건 – 소름돋는 반전

사건 당사자 김은비 양(당시 만14세)은 사연이 굉장히 많은 아이였는데
4년전만 하더라도 엄마와 떠돌이 노숙생활을 했다고 해.

이 아이가 거지꼴로 찾아 간 곳은 경주 보육원.
“엄마가 경주버스터미널까지 함께 와 이 편지를 이곳에 전해주라했어요”

편지의 내용은
-은비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이름이 은비일 뿐, 성씨도 없습니다.
제가 19살 때 낳았습니다.
어떻게든 같이 살아 보려 했지만,
더 이상은 힘들어 염치 불구하고 맡깁니다.
부디 불쌍한 이 아이를 저 대신 키워 주십시오-

아이는 보육원 입소한 후 예쁘장한 외모와
명석한 두뇌로 보육원 원장님과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어.

그리고,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데….
거리를 떠돌던 거지가 단 1년만에 초, 중등 검정고시를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것.

그리고 마침내 지역 명문 공립으로 알려진 경주여고에
2008년 3월 입학하게 되고
보육원을 나와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돼.

성적은 전교 13등,
장학금 받은 모범생.
선생님들고 좋아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장래희망은 의사!

그런데 2010년 1월 5일, 당시 경주여고 2학년이던 김은비 양은
경주여고 사거리 버스 정류장 인근에서 보육원으로 가던 도중 실종됐어.
김은비 양의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날도
“집에 빨리 갔다 올 테니까 다녀 와, 같이 저녁을 먹자”
라고 말했다고 해.
“장학금 서류를 보육원으로 전달하러 간다”는 증언도 있었고.

당시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으며,
경주경찰서는 용인경찰서와 공조하여 전단지를 배포하고
버스 정류장 주변 CCTV 화면을 공개하는 등 수사를 시작했어.

총망받던 아이가 갑자기 교복입은채로
사라졌으니 주변에서 반응이 어땠겠어?

하필 이때 조두순 사건으로 전국이 난리였을때라
혹시 불안한 마음에 사람들은
안좋은 생각까지 할 수 밖에 없었고
온갖 추측이 나무했었으며
당시 SBS에 방송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지.

그 런 데

이제부터 드라마급 반전이 시작돼.

마침내 김은비를 보았다는 제보가 경찰에 들어왔어.
은비가 발견된 곳은 경기도 용인.

납치된 것인가?
몹쓸 짓을 당했나?
사고가 있었나?

아니야
김은비는 용인에서 부모님과 잘 살고 있었어.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김은비는 김은비가 아니었어.
이모씨라고 알려진 24살의 여자였지.
이름도, 나이도, 엄마와 노숙생활하던 아이라 했던 것도 모두 거짓말.

당시, 고3이었던 이모씨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싶었고
명문대학에 가고 싶었어.
근데 고3이잖아?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이모씨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우등생이 되기로 한 거야.
스스로를 회귀물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렸지

부모님과 잘 살던 용인 집을 가출,
경주까지 내려가 보육원을 찾아갔던 것.
이미 배운 내용이니 초, 중 과정 1년에 패스,
천재소리 들으니 자신감도 생기고.
한 번 다닌 고등학교를 교복입고 한 번 더 다니니 매일 우등생.
성적은 전교 20등 이내 유지.

그러다가 현타가 왔는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간 것.

실종된 여고생 아니고 가출후 컴백홈한 여고생이였음…

4줄 요약


1) 과거로 돌아가고싶은 고3 여학생이 있었음.


2) 경주로 내려가서 이름, 나이 속이고 보육원 입소, 검정고시로 1년만에 초, 중등학교 과정 패스


3) 우등생 소리 들으며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다시 다님.


4) 이유는 모르지만 현타가 왔는지 말없이 집으로 돌아감.

여친 만나러 가려고 직장에 불지른 썰 푼다

2012년에 미국에서는 페인트공인 케이시 푸리가 살고 있었어.

그는 일상적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여자친구는 또 용케 있었는데…

휴가도 없이 휴일도 거의 없어서

여자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어.

그래서 문자로 안부를 물으니 자기 상황을 털어놓기 시작했어.

이때 그는 생각을 내다가,

“만약 직장에 불이 나면 작업 중단 가능하니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겠다”

는 대단한 논리를 생각해냈어.

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어.

일하고있던 직장에 불을 질렀지.

근데 거기가 로스앤젤레스 핵잠수함 USS를 만드는 작업장이었어.

페인트와 인화물이 잔뜩 있었던 내부는 완전히 불타고,

오버홀 작업을 위해 투입된 9400만 달러도 모두 잿더미가 되었어.

기존에 4억 5천만 달러가 예정되어 있던 오버홀 작업비보다

화재 복구비용이 4억 달러가 더 나왔다고 계산되자

미 해군은 복구를 포기하고 잠수함을 폐기하기로 했어.

이 사건은 단일 방화 기록으로는 사상 최대의 피해액으로 남아 있고,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다고 해.

푸리는 4500억 원의 피해를 끼치고

징역 17년과 25만 달러의 벌금을 내고 복역 중이야.

일각에서는

그 어떤 나라도 해내지 못한 미 연방국의 핵잠수함을

홀로 격침시킨 사람으로 칭송한다고도 하는데

내가 볼땐 그냥 정신병자야.

전설의 무하마드 깐수 – 정수일 간첩 사건

1990년 단국대학교에서는 아랍어과를 신설할 예정으로 현지인 교수를 초빙했어

그는 1984년에 한국에 들어와 연대 한국어 학당을 수료하고
단대에서 박사과정을 딴 후 단국대 사학과에 교수 임용이 되었어.

아랍어, 필리핀어, 한국어, 영어 등 7개국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로 매주 금요일마다 기도를 드렸고
성품도 선량하여 학생들에 인기도 많았으며
a+폭격기, 간디 교수라는 평을 받았어.

그러던 중 1996년,

안기부에서 무하마드 깐수 교수를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해

알고보니 깐수의 정체는 조선족 출신의 북한 간첩 정수일이었고
나이, 이름, 국적, 종교, 경력, 기혼 여부 및 자녀 유무까지 모두 거짓이었어

1934년 11월 12일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조선족이었던 정수일은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어.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하고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주 모로코 중공 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으로 활동한 엘리트였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엘리트의 길을 걸었던 정수일은 1963년 6월에 민족주의 정서에 젖어 북한으로 이주하기로 했어.

북한에 망명한 후에는 1974년까지 평양국제대학과 평양외국어대학 동아시아학부 아랍어과 교수로 재직했지.
결국 아랍어과 학과장까지 지냈어. 평양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언어 능력과 외모로 조선노동당의 관심을 끌게 되었어.
그래서 1974년 9월부터 1979년 1월까지 간첩 교육을 받고 남파 공작원으로 변신했어.

1979년 1월, 레바논 국가를 접수하고 남한을 암시하며 중요한 정치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레바논이 전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베이루트로 향했지.
1979년 11월 ‘무하마드 깐수’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어.
말레이시아 이슬람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경력을 쌓은 뒤 19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했어.
1984년 2월, 필리핀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의 아들 깐수로 국적 검열을 통과해 한국 입국에 성공했어.

한국에서는 1984년 6월부터 1996년 7월까지

단파 라디오를 통해 161번에 걸쳐 북한 지령을 받아들였어.
남한에 있을 때 상급에서는 구체적인 첩보활동을 요구했고,
1996년 2월까지 암호화된 편지를 통해 75건의 정보를 전달했지만
통일부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어.
편지는 영어로 작성된 것처럼 보였지만,
뒷면에는 특수문자로 작성된 비밀 보고서가 들어 있었어.
이 특수문자는 20번 정도 반짝반짝 빛이 난 후에야 눈에 들어왔고
특수 화학처리가 필요했어.

그런데 1996년 3월에 팩스로 전송 수단을 바꾸면서 들키게 됐어.

후에 폭로된 바에 따르면 정보 내용은 북한에 대한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해.
이는 재판에서도 반영돼 초기 사형 판결에서 벌금형으로 감형됐어.
변장이 너무나 철저해서 그의 아내조차 그가 간첩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고 해.
그는 실제로 잠을 자면서 아랍어로 중얼거리고,
무슬림의 생활을 코스프레하는 정도였어.
한국에서 한 결혼도 첫번째가 아니었고,
그의 부인과 성인이 된 딸들은 모두 북한에 살고 있었대.

판결은 정수일이 필리핀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법상 국외추방을 요청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는 출입국 관리법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있는 곳에 있었는데도
출국을 포기하고 자신의 국적을 ‘북한’으로 밝혔어.
처음에는 약간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외국인 행세를 했지만,
체포된 이후에는 완벽한 한국어를 써가며 수사관들을 놀라게 했어.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정수일의 사연과 탐사 결과, 참회의 의사 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형으로 선고받았어.
그 후 2000년 광복절에 석방돼서
2003년에는 특별사면과 복권을 받고 학계로 돌아왔어.

영화화 된 실제 사건 – 샘물교회 아프간 피랍 사건

2007년 분당에 있던 샘물교회가 총 3회 이상의 선교활동을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어.

외교부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여행에 대해 샘물교회에게 우려와 경고를 했어.

근데 샘물교회는 그걸 무시하고 여행을 이행할 거라 밝혔어.

정부는 첫 번째 비행티켓을 강제로 취소했어.

그에 대해 샘물교회는 분노로 가득 차 종교탄압으로 이어질 것이라 운운하며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걸기로 했어.

그래도 두 번째 티켓은 취소되지 않고 경고만 발행됐어.

출국 후, 다른 나라 3개국을 돌아서 아프가니스탄에 입국했어.

출국 사실을 알게 된 외교부는 전용 비행기를 보내 귀국을 강력히 요청했지만 거부당했어.

그래서 외교부는 또 다시 경고를 발표했어.

샘물교회측은 유서를 남길 것이라 밝히며 외교부의 간섭에 불쾌한 표시를 했어.

그랬더니 결국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포획됐어.

탈레반 지도자인 아마디는 한국인 20여명이 포획되었다고 AP통신에 알렸어.

탈레반은 한국에게 시한내에 철군 여부를 결정하라는 통보를 했어.

피랍 가족들은 군 철수를 요구했어.

근데 탈레반은 시한이 지났지만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보류했다고 통보했어.

외교부장관과 가족들과의 면담이 시작됐어.

탈레반이 마지막 통신에서 “시한내 결정통보가 없으면 한국인을 살해할 것”이라고 전했어.

대통령은 대담화를 통해 탈레반에게 “오판 말아달라”고 전했어.

탈레반은 한국에게 다시 한 번 통보하여 “결정 여부를 말하라”고 요구했어.

외교부는 한 달 안에 답변을 줄 것을 통보했어.

구조 작전을 펼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탈레반이 한국에게 전했어.

한국 외교부는 계속해서 탈레반에게 연락을 시도했어.

탈레반은 한국에게 마지막 경고 멘트를 통보하여 “군 철수하라”고 요구했어.

샘물교회는 정부에 대한 안일한 대응으로 강력히 항의했어.

대통령까지 나서서 테러범에게 호소하는 영상을 발송했어.

결국 테러범들에게 약 600억원을 주고 협상을 이루었어.

피랍됐던 19명의 한국인 인질들이 석방됐던 당시 모습

근데 이게 끝이 아니야